천국일꾼 양성

천국일꾼 양성의 성경적 의미

예수님은 12제자를 택하시고 이들을 훈련하시는 일에 매진하셨습니다. 바로 천국 일꾼을 양성하신 것입니다. 신약 성경에 기록된 많은 가르침은 대중을 향한 것도 있지만, 제자들을 양성하기 위하여 그들에게 특별하게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마지막에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심으로 제자들에게 희생과 사랑의 생생한 교훈을 삶으로 보여주셨습니다.

그 후,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을 때,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을 제자로 삼아”라고 하셨습니다(마 28:19). 또한 바울 사도는 제자 디모데에게 “네가 많은 증인 앞에서 내게 들은 바를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라 그들이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으리라”고 합니다(딤후 2:2). 이와 같이 성경의 원리는 예수님의 제자는 또 다른 제자를 낳게 되어 있습니다(요 1:40-42).

신약 성경(개역개정)에서 ‘일꾼’으로 번역되는 원어는 ‘디아꼬노스’(사역자로서 일꾼) ‘에르가떼스’(단순한 일꾼), ‘휘뻬레떼스’(전문성을 갖고 도우미 역할을 하는 일꾼), ‘레이뚜르고스’(행정을 포함한 일꾼), ‘쉰에르고스’(동역자로서 일꾼) 등 다양합니다. 이렇게 여러 단어가 우리말에서 ‘일꾼’으로 번역된 것은 일꾼이 감당해야 할 책임이 매우 다양하고, 특별함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충현교회 천국일꾼 양성의 시작

이러한 성경적 의미로 볼 때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예외 없이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야 하며, 예수님의 제자는 천국을 위하여 일하는 천국일꾼이라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천국 일꾼을 키운다는 것은 단순히 주일에 성경만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전인교육과 생애교육의 차원에서 기독교 세계관을 심어주고 이에 걸맞은 일꾼으로 살아가게 하는 일입니다.

‘천국일꾼 양성’은 5대 목표 중에 가장 먼저 선포되었습니다. 원로목사님께서 5대 목표 중에 가장 먼저 천국일꾼 양성을 선포하셨을 때, 우리 교회는 가파르게 성장하고 있었습니다. 날로 불어나는 교회학교의 어린이들과 ‘몰려드는 새벽 이슬 같은 청년들’의 무리를 보면서 예수님의 심정으로 설정된 목표가 ‘천국일꾼 양성’입니다.

충현교회는 설립 초기부터 교육에 세심한 배려를 해 왔습니다. 그래서 첫 예배를 드리는 날부터 장년, 유년 주일학교를 같이 열었지요. 초창기의 어려운 가운데서도 학생지도를 위한 교역자를 초빙하는 데 조금도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다른 모든 분야에서도 보이지 않는 일꾼들이 많았지만, 특히 교육 분야에서는 가르치는 사람과 배우는 사람 모두 열성으로 임했습니다.

그런 맥락을 이어 교회 설립 10주년을 맞이한 1963년에는 '천국일꾼을 키우자'라는 영구 목표를 세웠고, 어느 교회도 따라올 수 없는 충현교회만의 창의적인 활동들을 일구어가게 되었습니다. 1962년 12월 16일 당회에서 김창인 목사는 충현교회의 장기적 표어를 '천국일꾼을 키우자'와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로 할 것을 제안했는데, 이 내용이 회의록에 담겨 있습니다. 또한 1963년 1월 첫 주일에 김창인 목사는 설교에서 '충현교회=천국일꾼 양성'으로 요약되는 신앙관과 온 교회가 지향해야 할 신앙태도를 밝히기도 했습니다.

당회록 1962.12.16 역군을 키우자 p62-49

당회록 1962.12.16 역군을 키우자 p62-50

당회록 1962.12.16 역군을 키우자 p62-51

당회록 1962.12.16 역군을 키우자 p62-52

유년주일학교의 시작

유년주일학교는 1953년 11월 1일에 문을 열었습니다. 처음 교장은 김창인 전도사가 맡고, 부장에 최재성 장로, 부감에 홍수정 집사가 맡았습니다. 작은 조직으로 시작했는데. 문 연 지 두 달 만에 120명이 넘는 어린이들이 주일학교에 다니게 되었습니다.

1954년에는 교사 8명이 정식 임명되어 주일학교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습니다. 이후 급속도로 발전하게 되었는데, 교사 조직만 35명이었고, 유년주일학교 학생은 150여 명이었습니다. 교사 1명당 학생 4명 정도의 비율이었지요. 또, 그 운영 또한 체계를 갖추어 전도, 봉사, 지육, 사교, 음악, 축하과로 나누어 학생들의 생활지도를 했고, 신입, 유치, 초등(1, 2학년), 중등(3, 4학년), 고등(5, 6학년), 사범과로 나누어 학생들의 학습지도를 하였습니다.

이렇게 체계를 잡아가다 보니 1955년 말에는 유년 주일학교 학생수가 263명으로 두 배 가까이 늘었습니다. 주일학교 첫 졸업생이 배출되었고, 이들은 '새싹회'라는 이름으로 어린이 면려회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어린이 성가대가 만들어져 어린이 예배시간에는 어린이 성가대가 찬양을 도맡았습니다.

이후 1958년 9월에는 충무로 성전 건축 낙성식을 기념하여 전국을 대상으로 하는 '전국어린이성경동화대회'를 개최하게 되었습니다. 이 대회는 경기노회, 기독교방송국, 기독공보사 등이 후원한 행사로, 후원처들만 보아도 이 행사의 규모가 얼마나 컸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이때 유년 주일학교 학생은 370명이 넘었는데, 새 성전이 완공된 시점이어도 크게 늘어난 학생들을 수용하는 데 공간적인 어려움을 겪기도 했습니다. 1959년 8월, 당시 유년주일학교 교사로 있던 홍종만 집사가 유년부 지도를 맡으면서 전담지도자를 둔 주일학교 운영시스템이 갖추어졌습니다. 어린이회를 조직하여 어린이신문을 발간하기도 하고, 어린이 자치활동이 활발했으며, 열심과 사명감을 가진 교사들이 점점 늘어나게 되었습니다.

1960년 10월 홍종만 집사가 물러나고 당시 학생회 지도를 맡고 있던 조천일 강도사가 학생회 지도와 유년 주일학교 지도교역자를 겸하여 보았습니다. 그러다 1962년 5월 임승원 전도사가 지도교역자로 부임하게 되었습니다.

임승원 전도사는 주일학교 교육에 남다른 관심과 애정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주일학교 행정, 조직 등을 재정비하는 한편, 교재와 교사 훈련 등에도 많은 일을 했습니다. 특히 여름 어린이성경학교 때는 교재편찬, 교사강습회 등을 자체적으로 실시하는 데 큰 힘을 쏟았습니다. 이런 노력에 힘입어 1962년 전반기를 마칠 때에는 교사 46명, 학생 440명 규모의 교회가 되었습니다.

1963년에는 심성산 선생을 어린이성가대 정식 지휘자로 두고, 송철연 선생을 반주자로 맞이하면서 유년 주일학교 운영이 전체적으로 조화롭게 꾸려지고 발전해가게 되었습니다.

미취학(영아부·유아부·유치부)

취학(유년부·초등부·소년부)

중고등학생회의 시작

교회 초창기 학생활동이 무척 활발했습니다. 설립예배 때 구성원 18명 중 10명이 학생들이었고, 이들은 설립 당시부터 참석하면서 성가대를 조직하고 예배를 돕는 활동을 적극 해나갔습니다. 이들에게 교회는 처음을 함께 짓는 주체로서 조금 더 각별할 수밖에 없었지요. 1953년 11월 24일 중고등학생회 창립총회를 갖고 회장에 김창호, 부회장에 박경숙을 선출하였습니다. 20명에서 시작한 중고등회는 오늘의 중등부, 고등부의 시초였습니다. 특히 김창인 전도사는 학생 지도에 큰 괌심을 갖고 직접 이들을 지도했습니다.

1954년에 들어서면서 황기성 집사를 초대 학생회 부장으로, 김관형 전도사를 학생회 지도교역자로 임명하여 학생회 지도에 힘을 기울였습니다. 1956년 초, 중고등학생회를 '학생신앙운동(SFC)'로 이름을 바꾸고, 학생지도위원회를 구성해 황기성 집사, 김선운 집사, 김상철 집사를 임명해 학생지도에 힘써왔습니다. 그해 4월 8일, 최훈 전도사가 학생회 지도교역자로 부임하면서 학생회는 보다 더 활기를 띄기 시작했습니다.

1960년 11월 조천일 강도사가 부임하면서 주일학교 체제를 바꾸기 위한 노력이 이어졌습니다. 1961년 5월 28일, 처음으로 중고등부 교사가 4명이 임명되었고, 7월 30일부터는 성경공부와 예배를 구분하여 오전 9시에는 성경공부를, 10시에는 중고등학생 예배를 실시하였습니다. 이어 1963년 6월 9부터는 중등부와 고등부 예배도 분리하게 되었습니다. 예배가 분리되면서 중등부는 중등부성가대로 따로 조직하여 중등부 예배에 참여했습니다. 고등부성가대 또한 꾸려지면서 주일 낮예배 2부 찬양을 고등부성가대가 맡아 예배를 돕게 되었습니다.

당회록 1963.6.2 학생수 증가로 인해 중.고등부 분리 예배 실시 p63-20

당회록 1963.6.2 해석본

중등부

고등부

대학생회와 청년회의 시작

주로 유년 주일학교 교사로서 교회봉사의 일선에 섰던 청년들이 자체 모임을 갖고 청년회 설림총회를 가진 것은 1956년 1월 15일이었습니다. 성전건축이나 성가대 등으로 열심히 봉사하던 청년들은 그해 9월부터 매주 성경공부를 하며 내적 충실을 기하고 밖으로는 돈암동에 성암교회를 개척하는 쾌거를 낳기도 했습니다. 초창기부터 열성적으로 일해 왔던 김창호, 오진국, 박경숙, 김은주 등은 고등학교를 졸업하자 곧 대학생회를 조직하고 1956년 6월 창립총회를 가졌습니다. 새로 출발한 대학생회는 충현교회 학생신앙운동(SFC)에 흡수되어 중고등학생회와 함께 활동했는데 이때에도 대학생회를 별도로 조직하여 자치활동을 열심으로 이어갔습니다.

그러다 1958년 청년들의 힘을 한곳으로 뭉치기 위해 30세 이상으로 구성되었던 청년 회원의 자격을 낮춰 대학생회와 청년회를 통합하게 되었습니다. 1958년부터 대학생회를 흡수한 청년회는 주일 낮 성경공부와 토론회 등의 면려회 활동을 중심으로 활동을 활발히 이어갔습니다. 주로 주일학교 교사들로 구성된 회원들은 주일학교 발전에 일익을 담당했고 전도활동에서도 언제나 일선에 서 있었습니다.

1961년 조천일 목사가 지도교역자로 취임하면서, 청년회 구성원 대부분이 대학생이라 대학생회라 이름을 바꾸었다가 다시 1963년에 청년회로 이름을 바꾸고 교회 안의 많은 청년들을 더 많이 흡수하게 되었습니다. 1963년에는 정식으로 기독교청장년면려회(CE)에 가입해서 교회 밖의 활동에도 참여했습니다. 1970년 청년부는 청년부와 대학부로 분리하여 청년부, 대학부 발전의 큰 분기점을 이루었습니다.

대학부

청년부

장년주일학교의 시작

장년주일학교는 유년주일학교와 같이 1953년 11월 1일에 개교했습니다. 우성원 장로가 초대 부장, 원경식 집사가 부감을 맡았습니다. 성인 교인들의 성경공부를 주로 담당해 온 장년주일학교는 장년부 부장이나 김창인 전도사, 강진선 목사 등이 초기에 성경공부를 이끌어 주었습니다. 1956년에 들어서면서 교사 15명을 임명하고 주일학교로서의 면모를 갖추기 시작했습니다.

성경아카데미(장년부)

소망부

성경학교의 시작

일상적인 주일학교 운영의 흐름과는 별개로, 성경공부를 하는 흐름이 있습니다. 1963년 여름에는 김창인 목사가 직접 강사가 되어 중고등부의 하기수양회를 개최하기도 하고, 고등학생들의 농촌봉사활동도 활발했습니다.

1954년 여름에는 여름어린이성경학교를 시작해 해마다 성황을 이루었습니다. 더 많은 교육의 기회를 만들기 위해 애쓰는 와중에 여름 어린이성경학교와 같은 형태의 교육활동을 겨울에도 해볼 수 있겠다고 판단하고 1964년 1월, 한국에서는 처음으로 겨울 어린이성경학교를 운영하기도 했습니다.

당시 유년부 지도를 맡고 있던 임승원 전도사는 성경학교 교재를 직접 집필하고, 교사훈련으르 실시하는 등 최선을 다해 겨울 어린이성경학교를 준비하였습니다. 이때 시행한 겨울 어린이성경학교는 교사가 60여 명, 어린이가 500여 명 참여하는 성과를 내었습니다. 이에 힘입어 1971년부터는 중등부, 고등부에서도 동기수양회가 시작되기도 했습니다.

중등부 여름성경학교

고등부 여름성경학교

교육위원회의 설립

주일학교 학생수가 급격히 늘어나면서 교육에 대한 어려움이 커졌습니다. 부서 상호간의 편조도 필요하고, 피교육자를 파악하는 일, 교사들의 자질 문제, 부실한 교재 등 많은 문제들이 드러나기도 했습니다. 이에 대한 해법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1961년 6월 교육위원회를 설치하고 초대 위원장에 조천일 목사를 임명하였습니다.

본 교회 종교 교육상 현 실정에 비추어 교육 방면에 협조하는 기관으로 교육위원회를 설치한다.

교육위원회의 구성은 종교교육 지도 강사 및 장년, 유년, 대학생, 중고등학생, 성가대의 각 부장으로 구성한다.

- 1961년 6월 25일 당회 회의록

그러나 처음에는 여러 가지 어려움으로 교육위원회로서 크게 역할을 수행하지 못하고 있다가 1965년, 확대되는 주일학교와 교육을 전담하여 연구 발전시킬 조직의 필요성이 더욱 강조되면서 교육위원회가 다시 꾸려졌습니다.

교육위원회는 1966년, 주일학교의 인사문제를 주관하고, 주일학교를 운영하는 원칙들을 정비해가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주일학교 행정체계가 보다 안정적으로 자리잡히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교육위원회를 효율적으로 운영하면서 천국일꾼을 키우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가는 가운데 충현교회 설립 15주년이 되는 1968년에는 해외 선교활동이나 역삼동 예배당 설립 추진 등의 여러 변화와 함께 천국일꾼 양성의 의미를 다시 한번 아로새기게 되었습니다. 한층 높은 차원과 방법의 교사-학생-가정의 3자 연계교육과 훈련이 이루어지게 된 것입니다.

1961년6월25일 당회록

1961년6월25일 당회록 해석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