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전 건축

가정예배당의 시대

1950년 6.25 전쟁이 일어나 짧은 시간에 파죽지세로 전쟁에 휩쓸리는 바람에 서울에 있는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공산치하에서 신앙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1950년 9월 28일, 유엔군이 나타내는 해 서울을 수복하기까지 3개월이라는 시간을 종교의 자유를 억압당한 채로 지내야 했습니다.

잠시 수복되었던 서울은 1951년 중공군이 합류하면서 다시 전쟁터가 되었고, 이 1.4후퇴를 경험하게 되면서 한국 교회들 대부분은 서울에서 버티지 못하고 부산으로 피난을 갔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떠밀려 슬픔과 실의에 차 있는 피난민들 앞에서도 재개를 외치는 젊은 사자들이 있었으니, 그 가운데 한 사람이 바로 김창인 전도사였습니다.

김창인 전도사는 1949년 장충재건교회에서 시무하고 있었는데, 이듬해 6월 6.25전쟁때 부산에 내려왔습니다. 1951년 4월부터는 부산 서구 서대신동에 있는 서부교회에서 시무하게 되었습니다. 김창인 전도사가 맡은 뒤로 교회는 교세가 확장되어 150여 명이면 꽉 차는 예배당이 늘 400명도 넘게 교인들이 몰려들기도 했습니다. 그럴 때면 자리를 조이고 조여서 꼭 끼어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어쩔 수 없이 새로운 교회당을 짓지 않으면 안 되는 형편에 놓였는데, 그 당시 서부교회는 원래 다니던 사람보다 피난민 교인들이 세 배나 더 많았습니다. 그래서 기존 교회를 키우는 방식보다 새로운 교회를 세우자는 주장이 많았고, 그에 힘입어 1952년 6월 28일, 부산 서구 동대신동 1가에 대지 90평을 구입해 72평 정도의 교회를 새롭게 지었습니다. 이 교회가 바로 동일교회입니다.

1952년 말, 전쟁은 어느덧 3년째에 접어들고, 휴전 이야기가 조금씩 오고가기 시작했습니다. 부산에 피난하고 있던 교인들은 하나둘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동일교회도 다시 서울로 돌아와서 준비를 하게 되었습니다. 부산에서 동일교회를 만들었을 때 힘썼던 홍수정 집사, 이학주 집사도 서울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부산동일교회의 서울지부를 만들자는 이야기가 나왔고, 나아가 평양과 신의주 등지에도 동일교회 지부들을 만들자는 이야기도 나왔습니다. 그만큼 피난지에서의 동일교회의 위상과 힘이 컸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6.25전쟁 전에 김창인 전도사가 있던 장충재건교회 성도들이 그 교회를 정리해서 새롭게 만들어질 서울동일교회에 기금으로 보태었습니다. 김천준 집사가 중심이 되어 새 교회 터전 마련에 힘쓰게 되었습니다. 먼저 피난길에서 돌아온 성도들이 서울 신당동에 있는 성산교회에서 모여 예배를 드렸습니다. 성산교회는 점차 부산동일교회 성도들의 만남의 장이 되어 갔습니다.

서울동일교회 출발을 위하여 재경 부산동일교회 교우 제1차 회집 예배 함.

장소는 인현동 한명덕 집사 책 2층에서 보시고 이곳을 정하고 운동키로 함.

장년 남3, 여5, 학생 남8, 여2, 계 18명.

그러다 1953년 9월 5일에는 서울 중구 인현동에 있는 한명덕 집사댁 2층에서 18명이 모여서 서울동일교회의 첫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이와 관련한 사실이 1953년 9월 6일자 교회일지 첫 페이지에 실려 있습니다.

전쟁의 화마를 이겨내고 충현교회의 틀거리가 마련되었던 이 시기가 충현교회의 '가정예배당 시대'라 할 수 있겠습니다.

충현교회에서 첫 예배를 드렸던 18인의 모습

1953년 최초 예배 당시 작성된 교회일지

최초 예배 교회일지의 해석본

1954년 고등학생회에서 최초의 졸업생이 배출되었다

1954년 첫 주일부터 주보가 발간되었다

충무로 시대

서울동일교회라는 이름으로 가정예배당에서 활동하는 가운데서도 성전건축을 위한 건축부지를 물색하는 작업은 계속 이어졌습니다. 그러다 1953년 9월 21일, 서울시 중구 충무로 5가 36번지를 얻게 되었습니다. 이곳은 원래 중앙에 조선극장과 대원각이라는 유명한 요릿집이 있었는데 충무로 일대가 전쟁 피해를 가장 많이 입은 곳이기도 해서 대부분 불에 타버리고 주변에 건물다운 건물이 없었습니다. 성전부지로 매입한 310평 땅에도 조선극장과 대원각 건물 대부분은 불에 타 없어지고 작은 집 3채만이 남아 있었습니다. 이 공간을 기반으로 충무로 성전이 꾸려졌습니다. 음란과 방탕의 소굴로 알려졌단 바로 그 자리에 성전이 들어섰다는 것이 당시 신도들에게는 큰 감격으로 다가왔습니다.

1953년 11월 1일 새로 마련된 성전에서 주일 첫 예배가 이루어졌습니다. 그 이후로 교인들이 계속 늘어나서 14평 방에서 시작한 예배처가 더는 인원을 수용할 수 없는 지경이 되었습니다. 임시로 천막을 덧대어 공간으르 늘렸지만 제대로 된 건물을 세워야 한다는 목소리가 한층 더 높아졌습니다. 이듬해 1월부터 성전 건축위원회가 꾸려지고, 갖은 어려움과 씨름한 끝에 12월 16일 본당이 정리되고, 그곳에서 첫 예배를 드렸습니다. 다른 건물들은 아직 미완성인 상태로 있었고 겨우 본당만 정리되어 진행될 수 있었던 예배였습니다. 교회 앞을 다니는 사람들이 우리 교회를 보고 "저 교회는 언제나 아시바를 철수하나" 하는 이야기를 했다고 합니다. 충무로 성전에 들어설 건물이 모두 완공된 것은 1958년이 되어서였습니다.

충무로 성전 본당에서 예배를 드리던 시절까지도 우리 교회는 '동일교회 서울지부'의 이름을 계속 갖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1954년 5월에 세계기독교통일신령협회가 창설되어 소위 통일교가 성해 기독교계에 큰 물의를 일으키게 되었습니다. 동일교회라는 이름이 통일교랑 발음이 비슷해 오해를 사는 일이 종종 있었습니다. 또, 애초에 동일교회라는 이름이 부산 동대신동 1가에 있는 교회라는 뜻을 담았던 것인데, 이제 서울에서 새로운 성전을 마련하는 마당에 그 뜻을 살려 쓸 이유가 없다는 이야기도 나왔습니다. 그래서 당회 차원에서 교회 이름을 바꾸기로 하고, 투표를 거쳐 '충현'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습니다.

새로운 성전을 짓고 성도들이 예배뿐 아니라 다양한 활동을 할 수 있는 공간이 안정적으로 운영되는 시간이 펼쳐졌습니다. 1982년 마지막 예배를 드리는 날까지, 터전을 굳건히 일으키고 지켜내었던 시절, 충현교회의 '충무로 시대'라 할 수 있겠습니다.

충현교회 충무로 성전 영상

역삼동 시대

충무로에서 20년의 역사를 뒤로하고 1983년 충현교회는 역삼동에서 새로운 성벽을 일구었습니다. 이 작업 또한 갑자기 이루어진 것은 아닙니다. 1970년 11월 15일 당회 회의록에는 당회장인 김창인 목사님이 그동안 땅을 물색 중이었다가 새 예배당 터를 구매했다는 이야기가 실려 있습니다.

신축지 성동구 논현동 7번지의 11호(지목:잡목지) 9,000평을

평당 7,300원씩 합계 65,700,000원에 올렸음을 보고함

이 대지는 1971년 9월에 서울시 환지예정지로 논현동과 삼성동에 세로서 단일한 공간에 기록을 보관할 수 있는 땅이었습니다.

1984년 4월 16일, 역삼동 예배당 가운데 교육관과 선교관이 우선 완성되었고, 거기서 첫 예배를 드리게 됩니다. 순차적으로 건물들이 완성되어가다 1988년 12월 20일, 본당 새예배당까지 마무리되어 장장 8년 8개월 12일간의 새 예배당 건축의 대장정이 끝나게 되었습니다.

1988년부터 지금까지, 많은 시련을 딛고, 결국에는 극복해 나가고 도리어 많은 확장과 부흥을 이어온 이후에 충현교회의 '역삼동 시대'라 할 수 있겠습니다.

본당

제1교육관

선교관

제2교육관

제3교육관

충현복지관

역삼동 예배당의 시작을 알리는 기록

1980년 2월 14일 드디어 건축허가가 나왔다.

건축허가가 나던 날 공사현장의 실무자들은 '할렐루야'를 연발하며 감사와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건축허가를 위하여 쉬지 않고 기도로 애쓰신 건축위원장 김기정 장로, 하루도 빼놓지 않고 눈이 오는 추운 겨울이나, 드거운 여름이나, 몸에 병이 걸려도 중풍으로 한쪽 발을 쩔뚝거리며 묶였던 대지를 푸는 일과 건축허가를 받는 일에 피나는 노고로 뛰어다닌 한영기 집사와 건축기사들과 매일 철야기도와 새벽기도에 매달린 교우들, 모두에게 감사와 기쁨이 되었다. 이제는 모든 어려움이 지나갔다.

이제는 우리가 할 일만 남았다.

⟪김창인 목사와 충현교회⟫, 211쪽

역삼동
역삼동

충현교회가 새 교회당을 지으려는 생각은 교회설립 10주년이 되는 1963년부터 시작되었습니다. 1963년 1월 제직회는 이에 대비하여 앞으로 교회증축을 목표로 이웃 가까운 지역에 대지를 구입할 것을 가결하고, 그 기회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충무로 성전에 인접한 곳에 추가로 성전을 확장하는 방식으로 진행하다가, 1969년 11월 9일 당회에서 김창인 목사가 아예 한강 이남에 용지를 구하여 옮기기로 크게 방향을 틀었습니다.

현 교인의 분포상태와 서울 인구의 분산추세, 그리고 제반 여건을 감안하여 볼 때

꼭 현 용지만이 적지라고 볼 수 없는 점도 있으므로,

장래의 발전상을 고려하여 교회 적지를 물색함이 어떠하겠나

김창인 목사의 제안, 1969년 11월 9일 당회 회의록

이어 진행한 11월 19일 당회에서 한강 이남 쪽으로 새 예배당 터를 구하기로 결의하였습니다. 그런데, 정부 당국의 영동 제2지구 개발사업이 난항을 겪으며 교회 또한 여려움에 직면했습니다. 충현교회로 유입되는 성도들의 숫자는 급격히 늘어나면서 새 성전의 필요성과 긴급성이 계속 높아지게 되었으나, 주택전용지역에서 공공건물을 짓지 못하는 제도적 한계와, 학교시설부지로 책정된 정책에 부딪혀 한 발을 나아가지 못하고 새 예배당 건축작업이 지연되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1979년에는 대통령이 암살되는 등 정치적 혼란과 이에 따른 제반 정책들의 답보 및 제한정책들이 계속되어 어려움이 더 커졌습니다.

그런 가운데 1980년 2월 14일에 드디어 건축허가가 나왔으니, 새 예배당 건축을 위해 고군분투하던 이들의 가슴에 감사와 기쁨이 넘쳐흐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 한 장의 건축허가서 기록은 그래서, 지금의 역삼동 예배당을 시작하는 첫 출발을 상징하는 기록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역삼동 예배당 건축과정

충현교회 역삼동 예배당 살펴보기(1997년 당시)

역삼동 예배당 헌당예배

역삼동 예배당의 현재 모습

2023년 현재, 충현교회는 역삼동예배당을 중심으로 물리적인 공간 기반을 단단히 하는 한편으로, 그 위상과 영향력이라는 측면에서 더 넓고 깊은 공간을 아우르고 있습니다.

2023년 현재, 충현교회 성전, 혹은 예배당은 서울시 강남구 역삼동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1988년 4월 16일 이 예배당에서 첫 예배를 드린 이후로 지금까지 이 자리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있습니다. 충현교회의 역삼동 예배당은 본당, 선교관, 제1교육관, 제2교육관, 제3교육관, 복지관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아래 기록은 충현교회 예배당의 현재 모습을 담은 사진기록으로, 각 공간에 마우스를 올려 해당 공간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